어린이날의 할아버지
일년 365일이 모두 어린이를 위한 날인데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은 한마디로 난리 굿이 다. 온 세상 차들이 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인가 가는 곳 마다 길이 막혀 짜증은 나 고 유원지 앞은 장사진인데 우회마저 힘들고 식당은 어린 손님들께서 보무도 당당하 게 들어와 주위를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뛰고, 웃고, 울고, 떠들고 또한 괴성을 지르 며 자유를 만끽하는데 이 들에게 한 마디 했다가는 아동을 학대하는 괴팍한 사람으로 몰릴까 봐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슬며시 자리를 피하고야 만다. 일본에서는 3월 3일 은 여자 어린이, 5월 5일은 남자 어린이날로 구분되어있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리네와 같지는 않단다. 미국의 경우도 어린이에게 예절과 Manner로 철두철미하게 교육을 시 키고 공중도덕에 위배되는 경우에 현장 지적은 물론 가해 행위를 하는 모습도 영화 등 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반하여 우리의 아이들은 너무 방종에 이르지 않는가 하는 생 각도 해보았다.
어린이날 마침 내한 중인 일본 손님을 모시고 민속촌을 찾았는데 이 곳은 설마 했는 데 예외 없이 아이들과 함께 인산인해를 이룬다. 손에 손잡고 도시락 싸 들고 나선 인 파 속에서 어렵게 입장하여 이곳 저곳 기우리다 가 마침내 쇼크까지 먹고야 만다. 어 린 아기를 안고 뒷걸음치던 젊은 아낙이 내 발을 밟고는 급기야 사과를 하는데 “할아 버지 죄송해요.” 였다. 나는 망연자실 말을 잃고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사과를 안 들었었으면 좋으련만 다시 주서 담으라고 할 수도 없고 굳이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자니 그런데 그대로 할아버지를 받아들이자니 더욱 억울하다.
일찍 장가간 친구들은 손주가 몇 명씩 있는 친구도 있지만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 과 함께 언감생시 할아버지가 되려는 준비를 해 본적도 없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야 말 다니.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주던 젊은이에게 감사함 보다는 그대로 눌러 앉히면 서 힘 자랑으로 맞서고 싶던 심정과 별로 다름이 없다. 요새는 지하철을 타면 아예 젊 은이가 없는 곳을 골라가거나 아예 출입구 앞에 서서 간다. 나에게도 방법이 없는 것 은 아니다. 귀찮기는 해도 염색을 하면 이러한 사태(?)를 연착륙 시킬 수도 있지만 생 긴 그대로 꾸밈 없이 살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로서 삶 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몇 년 전에 미용 관련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 하면서 내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는 최면을 나 자신에 걸고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염색을 했다가 지금과 같이 천연 탈색으로 되 돌아오기까지 고생도 했지만 거울에 비 춰진 내 모습에 나도 전혀 친밀감이 가지 않았었다. 나를 바라 보는 가족들의 시선도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으며 둘째 아들 녀석은 아예 우리 아빠 같지 않다는 직설적인 평가까지 마다 않았으니 말이다.
스물도 종반으로 다가가는 큰 아들과 대학 졸업이 얼마남지 않은 둘째 아들과 함께했 던 십 수년 전의 어린이날 추억을 되 살리며 잠시 상념에 젖어보았다. 저녁 때 집에 돌 아와서는 아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집사람의 핸드폰을 달라고 하여 옛날 학교 때 배 운 김인로의 시조를 인용해서 넋두리를 떨어 보았다.
반중 조홍감이 좋아도 보이난다. 품어 반겨줄 이 없어 글로 설워하노라
어린이날 이벤트 좋아도 보이난다. 추억을 함께 나눌 아들 보고파 글로 설워하노라.
언젠가 시집을 가는 딸에게 당부를 하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손주를 낳으면 친정에 데리고 오되 그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데리고 오지 말라는 부탁이다. 손 주는 귀엽지만 그 애로부터 할아버지라는 말이 듣기 싫었나 보다.
흰 머리 덕분에 켄터키후라이라는 별명을 들을 때 인자함이 나의 향기이던가 하며 자 만했는데 할아버지를 그대로 자연스럽게 수용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꺼져가 는 불 꽃의 마지막 발화는 아닐진 데…..
아이들 노는 곳 근처에 아예 발길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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