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로 시작되는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처럼 서울이 정말 살고싶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일 까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서울중.고등학교에서 6년의 학 창시절을 보내고 서울은행이라는 직장에 28년이라는 긴세월을 몸담았던 내게는 이 서 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남달리 각별할수 밖에 없다.
이런 서울이 천도니 행정도시 이전이니 하며 한동안 시달릴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 할수 없는 심정이었지만 실은 나 자신도 고풍스러운 역사가 그대로 표출되어있는 파 리,런던등에 비해 어설픈 현대풍의 무질서하고 건조한 콩크리트 빌딩과 성냥갑같은 아파트숲으로 비추어지는 서울의 외형적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의 서울의 외형적 모습 내면에서 서울을 차지하고 자리잡고 서울 을 설계하고 관리랬던 옛선조들의 2000여년에 걸친 피와 땀과 지혜가 살아 숨쉬고 있 슴을 느끼면서 이 서울이야말로 세계 그 어떤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우주의 理致와 인간의 心性이 合一되어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룬 고도의 High -Tech 도시임을 깨닫 게 된 것이다.
서울은 원래 지금의 올림픽공원내 몽촌토성과 근처 풍납토성으로 이루어진 위례성에 서 출발하여 충청남도 공주(웅진성)로 천도할 때 까지 약500년을 백제의 도읍으로서 자리매김하였고 이후 조선시대 500년간 그리고 대한제국을 거쳐 대한민국 수도로서 100년, 도합 약1,100여년간을 왕도와 수도로서의 면모를 지녀온 역사도시이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렸 고 고려중기에도 양주라 불리던 서울지역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개경에서 서울로 천도를 위해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연흥전이라는 궁궐까지 지었으나 실행하지 못하 였고 그후 고려말 공민왕때 다시 한양(서울)천도론이 강력히 제기되었으나 정치적 갈 등만 야기시킨채 불발로 끝났고 결국은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국과 더불어 한양을 수 도로 정하고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고 한강의 젖줄을 타고 바다와 내륙으로 이어진 천혜 의 교통 요지인 서울은 그 옛날에도 한반도 경영의 제 일번지였슴을 여실히 보여 주 고 있는 것이다.
서울은 조선왕조 5대 궁궐중 正宮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內四山(북악산,인왕산,낙산, 남산)과 外四山(북한산,덕양산,용마산,관악산)에 의해 이중으로 병풍 친듯 둘러 쌓여 있으며 안으로는 西出東流하는 內明堂水(청계천)와 東出西流하는 外明堂水(한강)가 東西로 교차하여 흐르고 있고 북악을 主山으로 左靑龍(낙산), 右白虎(인왕산)가 양쪽 으로 포진해 있는 전형적 背山臨水의 최고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內四 山 정상을 연결하는 연장 약18Km 에 달하는 都城을 축조하여 동서남북에 四大門을, 그리고 그 중간중간에 四小門을 만들고 그 중심부에는 문을 여닫을때 치는 鐘樓를 세 워 四大門과 鐘樓의 이름을 人性의 기본개념인 仁.義.禮.智.信을 인용하여 각각 흥인 문,돈의문,숭례문,숙청문,그리고 보신각이라 칭하여 인간 정신수양을 강조했을뿐 아 니라 새벽 4시경에 33번(파루),밤10시경에 28번(인정)의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닫았 는데 이는 낮과 밤을 주재하는 33개의 하늘과 28개의 별에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편안 한 밤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또한 궁궐을 중심으로 左廟右社의 배치로 좌측에 종묘를 세워 왕실조상의 신위를 모 시고 우측에는 사직단(사직공원자리)을 설치해 國土神과 五穀神에 국가안녕과 민생 안정을 기원하는 祭를 올렸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兩亂을 겪은후 숙종대 에 와서 戰時 도성 방위체제를 공고히 하기위해 북한산성을 축성하여 국방력을 강화 하였다.
도성내의 도로는 大路,中路,小路의 세종류로 나뉘어 성문을 통하여 성문밖의 도로망 과 연결되어 있는데 大路는 넓이가 무려 17m나되었으며 지금의 동대문에서 세종로 네 거리를 지나 서대문에 이르는 길과,경복궁에서 세종로네거리를 지나 남대문에 이르 는 길이었으며 특히 경복궁앞 세종로길은 朱雀大路라하여 길양편으로 의정부와 六 曺,사헌부, 한성부등 관청들이 자리잡고 있어 六曺거리라고도 불리었다. 그리고 지금의 종로거리는 도성내 가장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다 하여 雲從街라 고 하였고 그 뒷골목길은 피맛골이라 하는데 이는 고관대작들의 수시행차에 엎드려 조아려야하는 백성들이 말을 피해가는(避馬) 길이었다. 서민들의 애환이 얽힌 이 길 은 지금도 허름한 선술집, 국밥집이 많이 들어서있는 길이기도하다.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위치한 北村은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에 위치해있다 하여 붙 여진 이름으로 왕실과 고위관직의 양반들이 거주하는 고급주거지로서 뛰어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조선성리학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배치된 두 궁궐과 빼어난 조화를 이루는 역사도시 서울의 자존심을 그대로 느낄수있는 곳이다.
최대한의 공간활용을 위해 ㅁ자형으로 지어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부각했고 서로 맛닿아 있는 지붕 처마선의 곡선미와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유연함은 이웃과 더불어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삶의 맛을 느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듯 하다.
반면 하급관리 또는 현직을 떠난 양반들은 南村이라 불리는 남산 기슭인 지금의 筆洞, 墨井洞에 살았는데 이곳은 그늘진 곳으로 항상 땅이 질어 진고개라고도 불리었지만 대신 지하수가 풍부하였다고 한다. 관직을 떠나 음지에서 筆墨으로 유유자적하며 살 아가는 청빈한 양반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 하다 (남산 딸깍발이의 유래).
최근 광화문을 비롯하여 경복궁, 경희궁등 궁궐과 청계천을 복원하여 그런대로 옛모 습 을 되찾았고 도성의 성벽도 일부 복원되었거나 복원할 계획이라한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전쟁으로 본래의 옛 모습을 잃어버렸던 서울이 그나마 현대의 성형기술(?)로 어렴풋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다.
조선왕조는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에 의해 힘없이 수난을 겪고 급기야 일제의 식민지 라는 쓰라린 치욕의 역사를 후손에게 남기고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림으로써 오직 하늘 의 뜻을 지상에 실현시켜 요순시대와 같은 大同社會 건설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우 리 선조들의 지혜가 너무 명분에만 사로잡힌 이상론이 아니었나 한편 아쉽기도 하지 만 人事가 곧 天理라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던 民本主義정신만은 서구의 르네 쌍스를 앞지르는 선진 국가경영철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이니 일본의 역사왜곡이니 하여 고대사에서 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 까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가 뿌리채 흔들릴 정도로 진통을 겪고있고 향후에도 중국의 팽창주의와 일본의 재무장등으로 국제간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으 로 예상되는 시기에 우리는 5000여년간 이 땅에 우리 조상들이 일궈온 소중한 유산을 한치라도 훼손되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줄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역사관부터 똑바로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경험으로 배운다는 말처럼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희망찬 미래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글로벌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서울의 모습은 국적불명의 현대식 고층 빌딩의 숲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속에 면면히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魂과 얼이 그대 로 표출되어있는 가장 한국적인 모습, 바로 이것이 가장 세계화된 서울의 참모습일 것이다. 국제도시, 파리 런던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도 그런 내일의 서울을 기대하며 이렇게 끝을 맺었나 보 다.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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