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도
(
舟山島
)
로 시집온 심청
(
沈淸
)
몇 년 전 섬진강 변 국도를 따라 여행하다 강을 향해 비스듬히 내린 산자락에
‘심청의 고향 곡성
’이라고 관목을 촘촘히 심어 잘 정지하여 만들어 놓은 문구를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다
. 어릴 때 읽은 심청전 소설이나 영화 어느 곳에서도 곡성이 심청의 고향이라는 내용을 보았던 기억은 없고 오히려 황해도 어디였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었다
. 그 후 신문에 난 백령도 소개 기사에서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가 백령도와 북한 장산곶 사이에 있는 바다라는 기사를 본 기억도 있었지만 주산
(
舟山
)
보타구
(
普陀區
)
심가문
(
沈家門
)
에 있는 심원
(
沈院
)
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심청에 대해 별 관심 없이 지냈다
.
올해는 추석까지 겹쳐 국경절 연휴가 무려
8일이나 되었다
. 긴 연휴가 아쉽기는 했지만
, 과거의 호된 경험으로 사람구경이 목적이 아니라면 연휴에는 중국 국내 여행을 피하겠다는 생각이 있던 터에 딸 내외가 추석 연휴에 잇대어 휴가를 얻어 상해로 오겠다 하여 일찌감치 외지 출행 계획은 접었었다
. 게다가 이번 연휴는 춘절
, 국경절 같은 국정 공휴일에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지 않기로 한 후 처음 맞는 것이기에 고속도로도 차산차해
(
車山車海
)
가 될 것 같아 더더욱 엄두를 못 냈었다
. 그랬는데 우연하게 기회가 되어 상해 모 대학 역사학과 한
(
韓
)
교수 내외 등 몇몇 중국 친구들과 함께 심가문을 방문하게 되었다
. 마침 긴 연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날이어서 인지 예상과 달리 차량이 많지 않아 생각보다 수월하게 목적지에 닿았다
. 주산도 남동쪽 끝에 자리한 중국 최대의 어항이자 수산물 집산지로 심씨들이 많이 살았었기에 그리 불리게 되었다는 심가문
(
沈家門
)
에 도착하니 바다로 면해 이어진 상가에는 어구 판매상과 함께 해산물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그 중 한집을 골라 입구 좌판과 비좁은 수족관 속에 갇혀있는 몇 가지 생선과 해산물을 골라 점심을 마친 후 물어물어 심원을 찾아갔다
.
안내표지는 물론 진입로 표시도 분명치 않은 길을 들어서 조금 가니 야트막한 언덕에 심원의 솟을대문이 나타났다
. 그 아래 검은 돌판 위에 중문과 한글로 진
(
晉
)
나라 때 백제에서 보타
(
普
陀
)
로 시집온 효녀 심청의 고사를 묘사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설명과 함께 심청 고사를 명기하였다
. 백제와 무역을 하던 거상 심국공
(
沈國公
)
이 앞 못 보는 부친의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홍법사
(
弘法寺
)
에 인신 시주
(
人身施主
)
한 처녀를 배 두 척에 가득 싣고 간 값진 물건을 주고 고향인 심가문으로 데려와 부인으로 삼았는데
, 이 처녀가 전라남도 곡성 사는 원량
(
元良
)
이라는 봉사의 딸 원홍장
(
元洪莊
)
으로 결혼 후 이름을 심청
(
沈淸
)
으로 고쳤단다
. 부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심청은
570존의 관음상을 조성 고국으로 보냈다고도 쓰여 있다
.
찾아오는 길에 이렇다 할 표지판도 없어 실망스럽던 차에 심청이란 이름이 심가문에서 연유되었다는 안내문을 읽고 나니 뭔가 개운하지가 않았다
. 그런 마음으로 둘러보니 모든 것이 눈에 안 찬다
. 초라한 의상을 입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효녀관
(
孝女館
)
의 심청 상을 보고 국공청
(
國公廳
)
의 단아하고 품위 있는 모습의 심국공 상을 보자니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
. 해로청
(
海路廳
)
벽면에 설치된 서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항로도
(
海上航路圖
)
는 고대부터 중국과 한반도 간에 해상 교류가 있었고
, 그 중심이 주산 보타로 심청도 그 뱃길을 따라 심가문으로 왔음을 역설하는 것 같았다
. 심원 제일 뒤편에 있는 심덕정사
(
沈德精舍
)
에 들어서니 우리가 배웠던 불교의 최초 한반도 전래연도
(372년
, 고구려 소수림왕
2년
)보다 훨씬 앞선 진
(
晉
)
영가
(
永嘉
) 6
년
(312년
)에 심청이 백제에 관음상을 보냈고
, 관음사를 창건하는 등 관음불교를 한반도로 전한 최초의 인물 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 전시물 중에는 곡성군에서 기증한 축소 복제한 관음사 금동관음보살 좌상과 관음사지
(
觀音寺誌
)
도 있는데 중국어로 설명된 관음사지 내용에는 원홍장이 심국공의 부인이 아니라 진
(
晉
)
나라 황후로 되어있다
.
곡성군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기 위해 곡성군청의
‘곡성문화관광
(www.simcheong.com)’을 보니 심청전의 근원설화로 송광사 법보박물관 소장
’옥과현성덕산관음사사적
(
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績
)’
에 실려있는
‘관음사 연기설화
(
緣起說話
)’
가 언급되어 있었다
. 효행
, 인신공희
(
人身供犧
),
개안
(
開眼
)
등 동일한 구성요소와 효녀
, 맹인 아버지
, 화주승
, 뱃사람
(진나라 사신
, 남경상인
), 황제 등 등장인물의 유사성을 근거로 들었다
.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으나 용왕
, 인당수
, 뱃사람 등 바다를 배경으로 한 심청전과 내륙에 위치한 곡성과의 연계성
, 연기설화
(충청도 대흥현
)나 심청전
(황해도 황주 도화동
)에 나오는 고향과의 상이 등으로 혹 타지자체가
‘심청의 고향
’이라고 나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중에도 특히 통일이 되면 심청전에 나오는 황해도 황주가 제일 먼저 나설지 모르겠다
.
어쨌든 곡성심청에 언급된 연기설화와는 달리 황제와 결혼했다는 원홍장을 심국공과 결혼시켜 심청으로 개명시킨 곳이 심가문이라는 보타구의 심청공정
(
沈淸工程
?
)
에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 곡성군이 우호교류협력
(2001년 우호교류협력합의서 교환
)이라는 형식을 통해 들러리를 서준 꼴이 되어 버렸다
. 심원에서 푸대접 받는 심청을 보면서 심사가 틀려 별생각을 다 해봤다
. 그럴 리야 없겠지만
, 곡성군이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고향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심청을 주산도로 시집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 중 하나다
.
2012
년
10
월
석중 전성진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