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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전성진 동문이 한중 수교 20주년을 회고하며
상해의 교민잡지에 기고한 글을 게재합니다
해마다 한중 수교 일이 되면 나는 내가 마치 무슨 역사의 증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하곤 한다. 더구나 올해는 20주년이라 하여 이 사람 저 사람 앞다퉈 회고담을 얘기하기
에 덩달아 옛날 얘기처럼 되어버린 나의 남조선 시절의 일들이 생각난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되던 날 북경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가 있었다.
그날 저녁 ‘90년 북경아시안게임 주 경기장이었던 공인체육장(工人體育場)에서 북한과의
경기가 벌어졌다. 당시 국가 대표팀 감독은 김호 씨로, 경기는 1:1무승부로 끝났다. 홍명
보 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1골을 넣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회사는 북경 주재 상사협의회 회장사로서 일정 부분 한인회 역
할까지 담당하여야 했었다. 선수단에 대한 편의 제공, 교민들을 위한 입장권 구매 대행,
응원단 조직 및 활동 지원 등을 하였는데, 이날은 수교 발표로 애초 예상보다 많은 사람
이 관전을 희망해와 확보했던 입장권이 동이나 필자를 비롯하여 당사 인원 몇 명은 긴급
히 추가 구매한 입장권으로 관전하게 되었다. 한참 경기에 정신을 팔다 뒤편의 이북식
말투에 놀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주위에 온통 김일성 흉장을 단 사람들뿐 이었다. 담
당 중국 직원이 생각 없이 한국 응원석 쪽이 아닌 상대편 쪽 좌석을 구입했던 것이다.
주변을 의식한 후로는 불안하여 경기에 집중이 안 됐으나, 마음 한편으로는 이젠 우리도
수교했는데 어쩌랴 싶기도 했다.
이날의 경기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북한 등 4개국이 참가한 아시아축구연맹 주
관 제2회 ‘다이너스티컵 축구대회’의 한 경기로 공인체육장의 높다란 전광판에는 ‘한국
(韓國)대 조선(朝鮮)’이라는 글씨가 선명하였다. 바로 이틀 전인 22일 저녁에 열린 일본과
의 경기 때는 그 자리에 ‘남조선(南朝鮮)대 일본(日本)’이라고 쓰여 있었으니, 수교가 되지
않았더라면 ‘남조선(南朝鮮)’대 ‘조선(朝鮮)’의 경기가 될 뻔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24일 오전 9시 북경 땨오위타이(釣魚台)에서 양국을 대표하여 이상
옥 외무부장관과 첸치천(錢其㻣) 외교부장이 한중 수교 공동 성명에 서명함으로써 국교
가 수립되었다. 그날 아침 삼환로(三環路)변 장안대가(長安大街)에 당시 북경에 주재하던
상사 주재원을 비롯한 3, 40명의 한국인이 모였다. 실질적으로 대사관 역할을 하던 무역
대표부가 있는 궈마오따샤(國貿大廈) 앞 1층 화단에서 노재원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태
극기 게양식을 했다. 중공(中共)과 남조선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86년 12월 초 여권 위에 바로 찍지 않고 별지에 찍어준 방문 비자를 어렵사리 받아
홍콩을 떠나 북경 공항에 도착하니 음산하고 흐린 날씨 탓에 시간보다 이른 어둠이 깔리
고 있었다. 13억 인구의 대국 중공의 수도 북경공항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촉수
낮은 백열등으로 그러지 않아도 희미한 대합실은 자욱한 담배 연기와 많은 출영객으로
무척이나 좁게 느껴졌다. 태연한 척 했지만, 모택동 모자를 눌러쓰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
오는 솜을 넣어 누빈 카키색 긴 외투를 걸친 사람들의 모습에 긴장되기도 했다. 생각지
도 못한, 턱없이 부족한 트롤리 쟁탈전에서 패배해 여행 가방과 선물 상자까지 챙겨 들
고 나오니 한겨울인데도 땀이 났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은 처음 온 남조선인에게 본
토 ‘만만디’를 맛보게 할 심산인지 추월도 하지 않고 2차선 공항로에 일렬로 늘어서 답답
하게 달렸다. 지금은 번화가인 삼환로변 허허벌판 속에 갓 문을 연 셰라톤 장성호텔(長城
飯店)이 내가 중공 땅에서 첫 밤을 보낸 곳이다.
나의 남조선 시절 얘기 중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천안문 사태 직전
인 1989년 5월 16일 북경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측 요청으로 주 경기장 전광판 하단 광
고권 획득 관련 최종 상담 차 출장 왔었을 때 겪었던 얘기다. 도착한 날도, 그 이튿날도
붉은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을 가득 태운 트럭이 내가 묵었던 호텔 앞을 지나 천안문 쪽
으로 향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른 저녁 후 호기심에 못 이겨 천안문 광장을
향했다. 천안문 가까운 난츠즈(南池子) 골목 입구 주변은 대규모 자전거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북경의 자전거란 자전거는 모두 다 그곳에 세워 놓은 것 같았다. 광장은 그야말
로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도 없는데다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한 불안한 생각에 역
사박물관 앞을 지나 첸먼(前門) 쪽으로 나왔다. 차량이 끊겨 충원먼(崇文門) 방향으로 한
참을 걸어 나와 겨우 빵 차(面包車)를 구해 호텔로 돌아왔다.
학생들만이 아닌 수많은 민중의 열망을 목격한 다음 날인 20일 이른 새벽부터 몇몇
중국 친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계엄령 선포 사실을 알려 왔다. 텔레비전에는 계엄령 포
고 내용 자막과 이를 낭독하는 아나운서의 위엄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중국 초유의
계엄령 선포로 서둘지 않으면 공항이 폐쇄될지도 모른다는 중국 친구들의 근심 어린 출
국 권유에 탈출하다시피 공항으로 나갔다. 출국 절차를 마치고 외부와 격리된 탑승 대기
실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종일 기다렸으나 이렇다 할 설명 없이 홍콩에서 북경으로 와 회
항하는 비행기는 끝내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외부와 단절된 공간인데도 어디서 소
식이 전해지는지 몇몇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서는 ‘리펑(李鵬) 총리가 다리에 총
상을 입었다’, ‘계엄군이 천안문 광장으로 진격해 왔다’는 등의 가지가지 미확인 유언비어
로 술렁거렸다. 정말 공항이 폐쇄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출국 심사 시 회수당
했던 별지 비자를 되찾아 재 입국,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낡은 굴절버스로 깜깜한 밤길을
달려 도착한 곳이 공항 부근 군부대 초대소였다. ‘남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투숙을
거절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내 의지로 온 것이 아니니 설마 무슨 일
이야 있겠느냐는 배짱도 생겼다. 방 배정을 받고 나니 온종일 굶어 허기진 배가 요동을
쳤다. 난방도 안 되는 썰렁한 초대소에서 하루 밤을 지새고 다음날 홍콩에 도착해서야
전날 10급이나 되는 강력한 태풍으로 비행기가 결항한 것을 알았다.
이외에도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생각나지만, 국적 때문에 참가신청 때부터 문제가 되었
던 북경대학 상학원(商學院)의 중국경제무역과정(中國經貿實務課程) 2년을 마치고 제출한
졸업논문이 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경제과학(經濟科學)’이란 동 대학 발간 격월간지에
‘남조선’ 아무개로 발표되었을 때의 씁쓸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수교 20주년을 맞아 한국의 각종 단체, 기관, 언론에서 앞다퉈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의 괄목할 만한 성장과 성과를 대서특필하고 있으나, 남조선 시절부터 현장에 있었
던 한 사람으로 그간 중국 내 한국의 위상 변화와 한중 관계의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비록 ‘남조선’이기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불편이 없지는 않았지
만, 이제 와 돌아보니 한국의 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호가 제대로 불리지 않던 그 시
절이 가장 높았다는 생각이 든다.
수교 후 정점에 있던 한국의 위상은 ‘94년 성수대교 붕괴, ‘95년 삼풍백화점 붕괴에 이어
‘97년 IMF 사태로 본격적인 하강국면으로 진입했지만 중국은 괄목할 만한 고속성장으로
이제는 G2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점에서 맞는 한중 수교 20주년이 우리
에게 마냥 즐거운 성년식 축제의 장 만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
닐 것이다.
2012년 11월 石中 전성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