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와 뭄바이
두 도시의 상관성은? 도시 명이 M자로 시작되며 유구한 역사와 함께 각 국의 최대 상업 도시라는 점이 공 통점입니다. 전자는 선조의 유물을 잘 활용하여 세계적인 관광도시에 손색이 없습니 다만 후자는 그야말로 쓰레기와 공존을 하고 있지만 신과 함께하여 행복하다고 하니 무엇이라 할 말은 없습니다.
격조했었습니다. 지난 7월 중순 본의 아니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3개월 여 재 충전의 시간을 가지 며 몸 만들기도 하고 사업하는 후배를 도와주기 위해 밀라노의 의약품 전시회와 뭄바 이 근처의 의약품 제조 실사를 목적으로 양 국을 방문했었습니다.
이태리는 여러 번 방문을 했었기에 색다른 감회는 없었고 기업가(피아트 자동차) 출 신이 대통령을 하면서 야기되었던 문제들을 들어보니 일류 기업가가 정치가로 성공 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그의 치적으로 남게 된 밀라노 전 시장을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니면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치적인 것은 확실하지만 진입로가 일년이 지나도록 개발이 되지 않아 2 차선만을 이용하다 보니 500m 진출에 한 시간이나 소요되는 일을 매일 겪어야 했습니 다. 전시회가 끝나면 시원함 맥주로 피로를 달래기도 했지만 듀오모 광장 옆 골목에 서 한잔 했던 에스프레소의 맛과 향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습니다.
뭄바이를 방문하면서 예전 마냥 사전에 많은 정보를 탐색하지는 않았지만 인솔자로 서 갖추어야 할 기본은 갖추고 출발했습니다. 9시간 가량 날라가 도착한 뭄바이는 1995년부터 개명한 것이고 우리들에게는 봄베이가 더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1860년 대 포르투갈 공주가 영국으로 시집을 가면서 헌납하여 영국령이 되었고 영국인들이 뭄바이 보다는 봄베이가 부르기 쉽다 하여 그리 100년여 불렸답니다.
1952년 한국동란이 한창이던 시절 한국 정부 대표로 부친이 방문하셨던 이래 둘째 아 들이 무려 52년 만에 방문하는 감회를 느껴보려 했지만 사치스러운 생각에 불과하다 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 쏘련과 유사하게 비행기가 새벽에 내리고 새벽에 출발하니 모든 여행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전투적으로 대응을 해야만 합니다. 다행히 시차 극복을 빙자하여 뭄바이에 하루를 묵으며 시내 관광을 했는데 명소라는 것이 영 국인들이 세운 인도문(The Gate of India)과 박물관 그리고 인도 남자들이 평생 일하 는 빨래방과 조잡한 기념품 가게들 뿐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여름을 연상하면 될 날씨에 하루 종일 시달리다 호텔에 돌아오니 맥주 생각 이 간절한데 없다네 요. 맥주를 사려면 호텔 문을 나서서 길을 건너 5분을 가야 한다 는데 길 건너기도 만만치 않고 길거리는 한국인 홀로 나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기 에 이솦 우화에 나오는 여우가 높이 달려있는 포도를 신 포도 라고 했듯이 “이 동네 맥 주는 맛이 없을 거야” 로 단념을 해야 했습니다.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Sea Food 식당 에 갈 때까지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그 곳에도 술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술을 드 시려면 Bar가 있는 식당이나 Hotel에 가야만 한답니다. 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나 라 라고 정의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4시 출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을 날라 아메다바드에 도착했고 오전에 잠 시 명소를 방문한다고 데려간 곳이 마하트 간디의 기념 박물관입니다. 어제에 이어 매 일 간디를 방문하면서 그들에게 우상으로 남아 잇는 존재에 비하여 우리의 건국의 아 버지 이승만박사는 잊혀지고 김구선생만 부각되는 것이 두분 모두 암살을 당했기 때 문인 것 같습니다. 안내자의 침 튀는 설명을 뒤로하고 210Km를 자동차로 달려 앙켈슈 와르까지 가면 둘째 날 일과는 끝이 납니다. 쓰레기와 공존하며 거지와 같은 삶을 영 위하는 그들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며 4시간 반을 달리면서 오직 안전하게 돌아 올 길 을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지역에서 가장 깨끗하고 격리간 된 호텔도 방에 들어서는 순간 코 끝에 달려드는 냄새 를 감지하며 2박을 해야 한다니 가슴이 막혀왔습니다. 물론 미니바나 Internet은 상상 할 수도 없습니다. Business Room의 Computer는 먼지가 쌓여있고 한글을 인식하지 도 못하니 무용지물이지요. 현지인들과 호텔에서 식사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곳 에 있는 동안 조중석식 모두 이곳에서 해결해야만 한답니다. 뭄바이에 비해 모슬림이 더 성한 곳이라 내 맥주는 어디에 하면서 용기를 내어 물어보니 특별히 내방으로 맥주 를 현지인이 보내주겠답니다. 6병을 보내주겠다고 하기에 염치 불구하고 10병으로 증 가를 시켰습니다. 냉장고에 쌓여(?)있는 맥주를 보니 가물에 비를 만난 듯 합디다.
이틀간에 걸친 타이트한 실사 중에도 돌아가서 먹을 맥주를 생각하며 갈증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카레에 식상한 일행들은 아예 방에서 Cup 라면 운운하기에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맥주와 컵 라면을 놓고 일행 셋은 이국 땅에서 나이를 초월하는 대화와 우 정을 쌓아가기에 충분했습니다.
돌아올 길이 걱정되어 예정 보다 두 시간이나 서둘러 일찍 출발했는데도 마을 사거리 만 나타나면 차들이 엉켜 붙어 있어 소통이 안되니 비상 수단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갓 길은 아예 없지만 건설중인 옆길을 달리는 것은 그래도 정도라고 봐 줄만 한데 버 젓이 역 주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탄 차도 4Km 정도를 역 주행에 성공하여 30 분 이상을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목숨을 건 귀국 길이었습니다. 지금도 귀 에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경적 소리입니다. 비키라고 빵빵. 지나간다고 빵 빵 그리고 비켜주어 고맙다고 빵빵을 눌러댑니다. 물론 차격이 인격 보다 높은 것 이 현지 사정이지요.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분하는 요소 중에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통신은 그 중 으뜸 이라고 사료됩니다. 페레스트로이카시절 러시아 지방 도시를 여행하면서 30Kg 운반 에 대형 트레일러를 동원하는 그들의 물류 시스템을 한심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고 모스크바에 전화를 걸기 위해 비서를 총 동원해도 연결이 안됐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도 호텔과 공장에서 모두 국내로 국제 전화를 거는데 실패했습니다. 공장의 교 환은 오히려 우리나라 국가 코드가 85번이라고 우겨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70년대까 지만 하더라도 북한 대사관만이 존재하던 사실이 상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공한 근처의 Taj라는 오성급 호텔에서 저녁을 했는데 주류는 없었습니다. 호텔 지하 에 리커 스토아가 있기는 한데 각자 방에 가서 먹어야 한답니다. 뭄바이 공항까지 또 참아야지요. VIP Lounge에서 만난 Heineken을 이몽룡이 오랜만에 밥 만난 것처럼 게 눈 감추듯이 해치워도 마음에 차지 않네요. 적정 온도를 맞추지 못했으니 한계효용체 감의 법칙이 일찍 적용되네요.
고생을 각오하고 떠난 여행이었고 벗어나기만을 갈망했던 여행이지만 며칠 지나다 보니 슬슬 추억으로 격상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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