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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 - 아버지의 세계

조회 수 25502 추천 수 0 2011.03.03 15:04:45

아래 글은 20회 회보(작년 4월)에 게재되었으며, 금년 서울고 동창회보(봄호)에 게재되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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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 남침전쟁이 일어난지 만 61년이 지난 해이다.

내가 태어난지 3달만에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에 의해 민족의 비극이 일어났고 한국군과 UN군 포함 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민간인 사상자는 약 백만명에 달한다.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포함 약 2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전쟁은 말과 글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처와 슬픔을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에게 남겼다.

 

아버지는 평북 철산에서 서당을 다니시다 뜻하신 바 있어 서울로 내려와 검정고시를 거쳐 경성의전을 다니셨고

수석으로 졸업을 하신 수재이셨다. 학교에서 아버지더러 독일 유학을 다녀오면 수석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교수 자리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당시에는 여유가 없어 유학을 가지 못하였으며 고향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고향에서 많은 환자들을 치유하셨으며, 시간이 흘러 해방이 될 무렵에는 안주평야에 만석을 경작하는 대지주였으나,

8·15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한 어느날 갑자기 부르조아 반동분자로 몰려 시베리아로 끌려가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하였으며

그 후 가족들도 따라 남하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족은 전쟁 중 사망한 사람은 없으나, 우리 가족 이야기는 북에서

살다가 공산당이 싫어 고향땅을 떠나온 경제적으로 몰락한 수많은 실향민들의 가족사 중 하나라고 하겠다.

 

나는 우리 가족이 개성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기다리던 중 태어났으며, 1·4후퇴와 함께 고향과는

더욱 멀어진 부산으로 온 가족이 피난하였다. 나는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쉰 세살(1898년생)

어머니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어머니는 평북 박천에서 이천석을 하는 외할아버지의 맏딸로 태어나셨으며,

평양(서문)여고 졸업생이시다. 외할아버지는 딸들을 의사나 판사에게만 시집을 보내셨다.

 

내가 늦둥이로 이 세상에 태어 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옛날 분이시라 유달리 자식 욕심이 많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과 전문의이셨으나 우리 남매들은 모두 당신 손으로 직접 받아 내셨다고 한다. 피난지인 부산에서 우리 가족은

기차 길 바로 옆에서 셋방살이를 하였으며, 의사 면허증 한 장만 달랑 들고 월남하였던 아버지는 그 동네에 병원을 차려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갔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번듯한 병원을 짓고 셋방살이를 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젊으셨을 때 사진은 풍채가 당당하셨으나, 쉰살 가까운 연세에 빈털털이가 되어 많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그로 인해 생긴 소화불량으로 체중감소와 노쇠한 외모가 어린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초등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 부모님들은 모두 젊어 보이는 데, 우리 부모님의 모습은 할아버지 · 할머니의 모습이라 어린 생각에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나의 부모님 연세는 초등학교 친구들의 조부모 나이이셨다. 몇 년 전 동기생인

이민주 할아버님도 경성의전을 나오셨다는 얘기를 민주에게서 우연히 듣고 확인해 보니 아버지가 몇 년 후배가 되시며,  

집에 보관된 당시의 부산의사회 사진을 통해 두 분은 부산 피난 시절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딸은 다섯을 두셨는데 맏딸만 고향 철산에서 제대로 시집을 보냈으며, 부산에서 일 이년 마다 나머지 딸들을 시집보내는

일들이 아버지의 당면 과제였다. 막내딸까지 시집을 보내시고 이제 아들 교육만 남아 좀 허리를 피실 만하셨으나, 환갑을 지난   

2년 후 가을 어느날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돌아 가셨다. 그 때 내 나이 만 열살 때이며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평생 환자들의 건강만 돌봐 왔으나 당신의 건강관리는 게을리 하신 것이다.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자식 사랑이었으며, 잠 잘 때는 아버지 옆자리에서 아버지의 큰 귀를 만지며 잠들곤 하였다.

아직도 아버지가 수염 자국 난 턱으로 내 뺨을 부비시던 그 때가 그립다. 요즘 나이가 들어 갈수록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왜 일까? 아마 저 세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뵐 날이 좀 더 가까워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저승이 있다면

이승에서 나의 마지막 소원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내가 설흔 일곱에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비하면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하셨으며,

이제는 두분 다 나의 마음 속에 똑같이 살아 계신다. 동기생 친구 가운데 이연수의 아버님은 검사인지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빨갱이들에게 끌려간 유복자도 있다.  그 친구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동기 중 그런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자기에 책을 싸가지고 다니는 책보를 메고 다녔으나, 나는 가죽냄새 나는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명절마다 새 청바지를 입고 다닌 것으로 친구들은 기억한다. 그러나 나의 어려움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찾아온다.

형들은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상태라 어머니는 병원을 세주어 나오는 몇푼 되지 않는 월세로 우리를 키우셨다.

한창 자라날 시기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였는지 나의 발육이 신통치 않았으며 무엇보다 아버지의 자리가 텅 비워진  

상황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반에서 여러 명을 뽑아 좋은 중학교를

보내기 위한 과외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집 사정을 아는지라 과외에 참석을 하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를 찾아와

반장이 과외를 빠질 수 없다며 그냥 나오라고 하여, 덕분에 나는 과외를 받을 수 있었고  부산중학교를 들어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수석졸업으로 부산일보 장학상까지 타게 해주셨다. 

 
어린 시절 나는 집에서 들은 이북 고향땅에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막연하게 아버지가 친일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여

나는 집밖에서 이 얘기를 절대 꺼내지 않았다. 왜냐면 학교에서 배우기를 일제치하에서는 한국인 모두 헐벗고  굶주린 것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던 어느날 조선일보에 게재된 ‘현대사의 순간’을 읽고 난 후다.

 

아버지가 경성의전 본과 3학년이었을 때 일본인 해부학 교수가 “조선 사람은 원래 해부학 상으로 야만에 가깝다”고

하는 망언을 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항의하며 동맹휴학을 하였는데, 아버지는 이를 주동한 학생 3명 중 한명으로서 퇴학을

당하였다가 나중에 일본인 교수의 사과와 함께 복학하여 무사히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찌하여 아버지는 생전에 이러한

얘기들을 자식들에게조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다니.... 아마 자식들이 모두 어린데다가 엄청난 민족의 비극과  가족의 몰락을

겪느라 경황이 없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제치하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신 분이다.

아버지는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명예를 지키신 분이었다. 한편으로 고향에서 자수성가 하신 후 농업학교를 설립하셨고,

평북 민선 도평의원도 지내셨다. 그리고 엘리트 의사로서 돌아가실 때 까지 많은 환자들을 돌보시는 데 일생을 보내신 분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자식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 이 땅의 모든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고향을 잃어버렸던 수많은 실향민들이 그들의 아버지 대신 고향을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는 우리의 소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자식과 그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해 나가기를 바란다.

끝으로 아버지가 남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글 ‘우리가 원하는 세계’ 중에서 마지막 구절을 소개한다.

 

“오! 신이여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소서. 그리고 사랑이 충만하고 사람과 사람이 뭉친 한 덩어리의 세계를 만들어 주소서.”

 

이 구절은 6·25전쟁이 끝난지 61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휴전선 이북에서 고통 받으며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 동포들에게 아직도 해당되는 말이다.

 

경성의전-460.jpg

경성의전 재학시절의 아버지 모습


어기

2011.03.05 14:23:30
*.130.120.36

아버님은 고향 철산에서 평양여고를 갓 졸업한 맏 딸을 당시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한 매부에게

반강제로 시집을 보내셨다. 왜냐면 누님은 시집보다는 대학으로 진학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누님의 큰 아들이 서울고 15회 졸업생이며, 나에게는 조카이므로 고교 선배이지만 그에게 반말을 쓴다.

그 조카의 손을 잡고서 서울고 입학시험을 보러 갔었다.  누님의 둘째 아들은 K고와 서울대를 거쳐

MIT 공학박사이며, 몇 년전 현대자동차 하이브리드카 담당 부사장이었다.

 

그리고 사촌형과 둘째형은 서울고 선배(7회)가 된다. 가족 중 4명이 서울인 가족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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