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당시의 남대문 1880년대의 남대문 중앙로 조선시대의 길거리를 가운데 두고 늘어선 초가집 1931년 박흥식(朴興植)이 서울 종로(鍾路)
2가에 세운 "화신 백화점" 당시 한국의 랜드마크적인 존재로 일세를 풍미했다.
화신백화점은 1987년에 문을 닫았고 1988년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되어 1999년 그 자리에는 미국 건축가 설계로
"삼성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1935년 서울 남대문 왼족의 상업은행과 오른쪽 중앙 "레토크림"
(レ-トクレ-ム) 화장품 세로 광고탑 오른쪽 "기린맥주"(キリンビ-ル) 가로 광고
평양에서 영업중인 왕복 노면전차 -운임 5전-
수풍 댐 수력 발전소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만주국과 조선의
전력확보를 위해 건설이 개시되었다. 건설된 것은 압록강하류의 평안북도 신의주로
부터 80 km지점의 한만국경(현재는 중.북 국경).
담수면적은 일본 비와코의 거의 반에 상당해
총공비는 약 5억엔이다. (이 금액은 동경에서 시모노세끼를 잇는
신칸센 건설 규모에 필적하는 금액이었다)
그 비용은 당시 한반도에서도 일대 중화학
기업인 조선질소비료 (현재의 질소/日チッソ-칫소)
가 부담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참인 1944년 3월에 수풍수력
발전소(발전 능력 60만 kW)와 함께 준공했다.
이 발전 규모는 당시의 세계 최대급이며 1940년 당시의 일본내의 수력 발전 규모가
280만 kW와 비교해도 그 크기는 용이하게
비교할 수 있다.
7기의 발전기는 각각 약 10만 kW의 발전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당시 세계 최대급의 능력이며 설비제조를 수주한 회사는 동경시바우라
전기(현재의 토시바)에서 제조를 맡았으며 시공업자는 일본 하자마구미와 니시마쯔
건설(間組, 西松建設)이 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총 7기의 발전기중
5기를 약탈해 갔다.
약탈된 발전기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이리티슈 카와카미류의
댐에서 확인되었다.
한국 전쟁중에 뇌격을 포함한 미군기의 공격을 받았지만 댐 구조가 워낙
견고했었기 때문에 파괴를 면했다.
전후에 북한은 발전 능력을 증강해 이 댐 덕에 부흥했다.
준공으로부터 60년 이상 경과한 현재도 댐 본체는 큰 개수 공사를 하지 않고
현역으로 활동 중에 있다.
1940년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호텔 "조선호텔"
선룸무도가 崔承喜의 모습
당시 번화가 명동의 모습 오른쪽 모자쓴 남성뒤로 "빅터 SP 레코드
""(Victor) 세로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간판 위쪽에는 레코드 판 광고판이
걸려 있다.
< 누가 고종황제를 죽였는가? >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1912∼1989)
1897년10월12일 고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앞은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종황제의 장례행렬 1919년 1월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고종 독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되었다. 그가 찾은 것은 당시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의 일기. 거기에는 고종황제의 죽음이 일본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의 시신 상태는 처참했다.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다. 또한, 30㎝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1919년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뒤이고, 고종도 이미 퇴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고종 독살설이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구라토미의 일기는 일본이 고종황제가
해외에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막으려다 여의치 않자 독살을
감행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고종은 이회영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1919년 19살의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와 진왕자가 탄생했을 때의 영친왕 부부.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친왕(가운데)의 모습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일본친정
가족 사진 Archive : 한일 친선에 생애를 바친 일본
황족 출신 이방자(李方子) 여사
-- 대담했던 한국 아낙네들 --
톱레스 치마 저고리
문명사회에 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
이었던 조선시대 아낙네들의 대담한 모습
러일전쟁 무럽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 여성의
"젖가슴 드러낸 치마 저고리" 풍자화
본문 일본어 내용 - 조선을 둘러 싼 러일간의 대립 - "조선중립"(조선 여성의 손을 주목)이라고 쓰인, 이미 깨져버려 못 쓰게 된 단지를 든 조선에
위로 말을 붙이는 일본. "그러나 가엾다. 만약 내가 침략해 오지 않았
더라면, 대신 침략한 것은 저 털보
소련놈들이었을 테니...!"
18세기 이후 조선 여성의 민족의상 "치마 저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장남을 낳은 여성은 젖가슴을 노출한다."라는 이상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아직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깊은 이 시대에 "장남을 낳지 못하면 여성의
가치가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이 의상은 여성에게 있어서 "남아를
출산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라는
상징적인 자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일본 순사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서도
굳건히 지켜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뒤인 1950년대까지도 이어졌었다.
아래의 사진은 프랑스 판화 화가
Paul Jacoulet(1896-1960)의 작품
그녀는 3살 때에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중국, 폴리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애를 일본에서 보내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서민의 기묘한 습속
인물화를 섬세한 선과 파스칼 컬러로
여성답게 표현했다
- 아침의 잡담 - 1921년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조선 서민의 기묘한 습속
당시 조선시대의 "톱레스 치마 저고리"는 1911년 한일합방이
되고서도 이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는 풍속문란이라고
하여 일본 순사로부터 길거리에서 뺨 맞아
가면서도 그렇게 쉽사리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바티칸 교황청 한국 대사관에 기증된
"한국판 마리아 상"
2005년 바티칸의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관에
안치된 한국형 성모마리아상.
성염 주 교황청 한국대사의 의뢰로 돌조각가 오채현씨가 약 10개월간 걸쳐
만든 약 2m 높이의 이 작품은 한복을 입은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가
등에 발가벗은 아기 예수를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동이는 천주교회에서 쓰이는
성수(聖水)를 나타낸다.
역시 압권이라면 성모 마리아가 가슴을
전부 대담히 드러낸 모습이 한국적이다.
당시 양반계급의 여성이 외출 때의 모습
장날
노점상, 비녀를 비롯하여 면빗, 얼레빗, 참빗들이
엿장수 소년이 커다란 엿목판을 걸치고 있다.
꽈배기 장수의 청년과 소년
독뚜껑위에 자배기를 지게에 교묘하게
올려놓았다. 이 당시에는 자배기와
독뚜껑은 특히 여인들이 잘 깨뜨리는 그릇이었다.
닭을 어리에 넣고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닭장수
옹기그릇 시장
누룩과 찰밥으로 지은 지에밥(술밥)을
햇볕에 펼쳐 놓고 말리고 있다.
복덕방 할아버지들
한강 용산 나룻터
참숮 팔러 가기
1900년 무렵의 조선 호랑이 사냥군들
여성들이 외출때에 쓰는 파라솔, 양산 대용
평양의 장터 길
일본의 조선 철도 기공식 당시 신작로가 전부였던 조선에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반도 곳곳에는 급속히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는 그 길이는 총영장 5, 000km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일본은 한국 식민지 정책에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하 대장군과 천하 여장군
기생의 나들이
서당의 학생들
쌀 티고르기
장터로 가는 길
결혼하는 날
소시장
멧돌로 콩을 갈고 있는 남성
쌀 찧고 있는 남성들
양반들의 장기두기, 한 팔이 넘는 긴 담뱃대에 주목.
American Electric Trolley, 1903 노면전차가 지나고 있다.
남대문 앞으로 일본군이 지나고 있다. 1903
괭가리, 징, 놋그릇, 갓, 촛대 등등...
당시의 광화문 정문
북쩍 거리는 장터
한약방
조선시대의 곤장
전당포
바구니 장수
당시 마포나루터의 풍경 네덜란드인 얀 아드리아니씨가 1904년
평양 시내를 촬영 모습
개천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모습 아직 눈이 남아 있는 계절이다.
멀리 언덕 위 높은 곳에는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이 3장의 사진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품
(미해군 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사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帥字旗)가 미해군 콜로라도함(USS Colorado,
배수량 3, 425 톤) 갑판에 걸려있다.
어재연 장군기는 136년이 지난
2007년10월에 한국에 10년 동안 임대되는
형식으로 돌아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사족(蛇足) :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
6월 10일, 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란, 쇄국정책을 펼쳤던 구한말
흥선대원군 당시 발생한 조선과 미국간의
전쟁이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1865년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입항
하려다 이를 침략행위로 간주한 조선
군민에 의해 저지되고 이 결과 셔먼호가
소각되고 선원 전원이 처형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배상과 통상을 요구하며
1871년 아시아 함대 5척을 동원해 조선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다.
이 결과 조선군민 250여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비록 조선은 이 전쟁에서
우세한 미군에 패했지만 미국 역시
조선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조선과의
통상이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40여일만에 중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더욱 더 쇄국의 길로 접어
들게 되며 서양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 역시 더 한층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미양요때 전사한 조선군사들 모습 이틀간에 걸친공격에서 5개의 조선궁
요새가 점령당하거나 파괴되고 조선군은 700여명 가운데 250명이 전사
미군은 3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1971년 이탈리아 베니스 출생 영국 사진작가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 1832-1909)씨가
촬영한 한국의 선박(Junk, 猛船)
맹선(Junk, 猛船) 조선시대에 실제로 전투에 사용된 선박으로 대.중.소맹선의 세종류가 있다. Masters of Photography - Felice Beato Samurai Photographs of the Nineteenth Century
호랑이 사냥꾼으로 불렸던 조선군들은 적에 잡히느니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미군에 의해 잡힌 조선군 포로는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힌
사진의 조선군 2명은 자신들을 촬영하려하자 이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조선 침공에 나선 콜로라도함내 미군 고위장교들이 조선지도 앞에서 작전
계획을 짜고 있다.
미해군측과 협상에 나선 조선 관리들의 모습이다.
1871년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우리측
문정관(問情官)이 포로협상단 대표가
미해군 군함에 승선 해 포로송환 협상을 위해 조선 포로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1871년 덕진진에 진입에 성공해 환희하는
미해군. 초지진에서 1박 야영을 한
미군들은 6월11일 이른 아침부터 덕진진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옛 조선시대(1920년대 전)의 의술
눈병 치료 그림을 그리고 눈병이 있는
눈에다 못을 박아 눈에 들어간 액귀를 아낸다.
땅바닥에 사람의 그림을 그린 다음
그 복부에 칼을 꽂아 두어 말라리아를 퇴치했다.
장티부스를 예방하기 위해 소머리와
마늘을 문앞에 둔다. 경기도
전라남도에서는 말라리아 퇴치 방법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환자의 발바닥에에 쓴다. 환자가 남자인 경우 왼쪽 발바닥에,
여자인 경우 오른쪽 발바닥에다 쓴다. 사진에는 "박대용"이라고 쓰여있다.
맥주병으로 황담 치료 환자가 있는 방 앞에 맥주병을 걸어두면
황담이 낫는다고 믿었다.
환자의 옷이나 모자를 나뭇가지에 걸어두면 홍역이 낫는다고 믿었다. 평안남도
설사퇴치 밥대접 위에 젓가락으로 십자가로 올려 놓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경상북도
고추를 처마밑에 걸어 두면 콜레라를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 액운을 짊어진 -
강이나 갈버닥에 버리면 각종 병이 낫는다고 믿어왔다.
1904년 광화문과 남대문(세번째 사진) 전경 1904년 당시 광화문의 모습과 해태상에서
노는 장난꾸러기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사진들은 미국 외교관 윌러드 스트레이트
( Willard Dickerman Straight)씨가 촬영한 것으로 미국 코넬 대학교(Cornell University)는
대학 홈페이지에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