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5세때 세종 임금 앞에서 시를 지어 신동(神童)으로 불렸고
동향(同鄕)인 집현전 학사 최치운은 논어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시습"을 따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데
호(號)는 매월당, 동봉이라하였고, 자(字)는 열경이라 불렀다.
17세때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18세때 증광시에는 낙방하여
일급일락(一及一落)의 낙방거자(落榜擧者)가 되어
후세에 낙방 거지라는 놀림을 받기도 하였다.
어린 임금의 복위를 힘쓰던 젊은 신하 여섯 사람
성삼문, 박팽년, 이 개, 하위지, 유응부 등은
고변(告變)을 받아
대궐에서는 삼경이 지나도록 고문이 그치지 않았고
악형(惡刑)은 사흘 밤낮 동안을 계속하였다.
다만 류성원은 끌려가기 전에 자진(自盡)하여
역사에 충절로 남을 것을 예견하였고,
끝내 여섯 신하의 아버지와 아들까지 몰살을 당하였으며
그들의 어머니와 부인, 딸들은 공신과 벼슬아치들의
집으로 종이 되어 끌려갔다.
20세의 시습은 이 사실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하다가
마침내 그는 삭발을 한 후, 세상을 등지게 되었으니 .....
수락산, 설악산, 금오산 등으로 삿갓을 쓴채
설잠(雪岑)이란 법명으로, 술에 취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후에 사육신을 고변하였던 영의정의 행차를 길에서 만나자
"벼슬을 탐하는 놈은, 벼슬을 탐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고
공을 노리는 놈은, 공을 노리지 않으면 할 일이 없다"고
민초들 앞에서 그의 영달(榮達)을 크게 희롱하였다.
평소 좋아하던 선배인 서거정(徐居正)의 술대접을 받고
소쩍새의 피로 얼룩지는 자규루(子規樓)를 생각하였는데
서쪽, 섯서쪽, 소쩍새는 다시 불여귀(不如歸)되어
돌아감만 못하다는 것은, 오지 않음만 못하고
울지 않음만 같지 못하여
듣지 않음만 같지 못한 새가 되었네.
고향 강릉의 성산에 들렸다가
제사를 잇지 못하는 괴로움에 가슴을 떨어야 했고,
한송정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떠오르는 감회는 .....
길은 십릿길 떼지은 겨울 소리
귓결에 울어예어 스산도 하이 .....
마음은 지금도 그전 같은데
걷고 걷다보니 물결만 더했구나.
만경(萬頃)은 어이타가 가이 없는가.
모두가 품안의 가슴이기에
제멋대로 살도록 버려두었네.
매월당이 금오산에서 지은 "금오신화"를
추강(秋江) 남효온에게 보여주었더니
남효온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보여 주었네.
이 책은 당시 남양의 지가(紙價)를 크게 올렸었는데
그는 매월당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세상은 어둡기가 지옥같다 하여도
무슨 일로 무릎 꿇어 관음 보살을 외우는가
마음을 잡으면 세상이 웃겠고
살림을 하자니 마음이 짐스러워
에라, 신선 얘기책이나 뒤적거리며
단풍속에 들어가 누워나보자."
고을 사또가 선비들을 죽서루에 초대하여
어린 관기(官妓)들과 질펀한 술상을 벌였는데
설잠(雪岑)은 음양지교(陰陽之交)를 농(弄)하면서
"무릇 남녀간의 교접은
인간의 생산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닐세 .....
중이 죽으면 남는 것은 신발짝 하나일 뿐인데
인간의 자손에겐 전할 것이 없구나 ....."
매월당은 추강(秋江)의 갑짝스런 부음(訃音)을 듣고
충격과 아쉬움으로 그를 회고하였다.
"옛 사람은 요새 사람과 비슷하고
요새 사람은 뒤엣 사람과 같을터라
세상사 흐르는 물과 같아서
흐르고 흘러 가을이 가면 봄
오늘은 소나무 밑에서 한잔 나누세.
내일은 아침부터 험한 산길일세
산 넘어 산속으로 가고 있는
그대 생각하면 더욱 정겨워 ....."
다음 해에 매월당도 부여 무량사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서산에 지는 해를 어렴풋이 바라보고 있었다.
뒤돌아보건대 사고를 당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여
삶의 곡절을 얼마나 많이 겪었던가!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으로
고단하고 불편한 삶을 얼마나 많이 살었던가!
그래도 뜬 구름같은 부귀공명을 좇지 않았음은
다행스런 영혼의 궤적이 아니었던가?
새들도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돌아가고 있네.
나도 새를 따라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으니 .....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데가 없으랴!"
후세 사람들은 매월당, 추강 등을
충절(忠節)의 생육신(生六臣)으로 기리고 있네.
2011. 2. 21 果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