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리 장터 2
김개남, 손화중 등은 훗날 고부에서 동학 혁명을 주도하고
차치구의 아들은 보천교로 동학정신을 이어가고, 젊은 김창수는
나라가 망하자 김구(金九)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장내리 장터에서는 교조의 신원 요구와 척양척왜의 깃발 아래
조정의 무능과 가렴주구, 탐관오리의 척결을 주장하였고
도인들 10만명 모두가 상경하여 대궐앞에서 집회를 열 것을
선동하는 자도 있었다.사태가 심각해지자, 급기야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도호사로 임명하여 해산시키도록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장터에 모인 동학도는 소수이고, 선량한 백성들이
부화뇌동함을 알고, 탐학과 외세에 대한 저항이 주요 원인
이므로 획기적인 내정 개혁 조치를 발표하여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장계를 올렸다. 조정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조정에서는 군대 500명을 파견하여 강제 해산하기로 정하였고
어윤중은 다시 장내리 동학 도소를 찾아가 회유.설득을 하였다.
탐학에 시달려 고통 끝에 목숨 걸고 저항하려는 자들에게
외국의 오랑캐가 이권을 챙겨가는 것에 분노한 자들에게
지방 토호에 시달려 억울함을 풀 길없는 자들에게
춘궁기에 식량이 떨어진 농민들과 몰락한 상인들에게
4월 2일 새벽 최시형은 군대와 충돌을 피하고, 도인들 보호할
명분으로 해산 명령을 발하였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는 얼마후 고부에서의 무장 봉기를 예고하는 불씨가 되었다.
*후기 : 얼마전 송강회 이준재로 부터 "몸이 아프냐?"는 전화를 받고, 기절초풍할 뻔
했다. 금년에 병원 한 번 안가봤는데... 詩集이 나오는 내년에는 친구들을 만날
예정이고, 자주 못본다고 유언비어로 놀라게 하지 말도록....
오랜만에 모든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