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산회 벗 님들:
전편에서 계속됩니다.
덕홍전과 함녕전은 행랑으로 둘려져 있고 문이 세 개 있습니다
. 가장 앞쪽에 보이는 것이 유현문
(有賢門
)입니다
. 아치형으로 벽돌을 쌓은 특이한 모양의 문입니다
.
덕홍전입니다
. 편전으로써 응접실로 쓰였습니다
.
옆의 함녕전과는 담으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고 좌우로 출입문이 각각 있습니다
.
덕홍전의 내부 공사가 완료된 것은 1912년 이어서 천장에 전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벽 윗 부분에 용문양과 함께 대한제국의 문양인 이화(梨花)章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함녕전을 앞에서 부터 보기 위해 함녕전 회랑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 함녕전 앞 회랑의 前면 입니다
. 저 멀리 있는 건물이 아까 본 중화전입니다
.
왼쪽 끝에 있는 좌상은 세종대왕상입니다
. 사실 세종대왕은 덕수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인데 왜 여기 설치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앞에서 보아 오른쪽에 함녕전과 덕홍전을 싸고 있는 회랑이 있고 회랑의 세 칸이 함녕전의 입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원래 덕홍전의 앞에 광명문이 있었지만 일제 시대에 중화문의 서쪽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
입구로 쓰이는 회랑에서 바라 본 고종황제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입니다
.
입구를 통해 들어갑니다
. 원래는 서쪽에 있는 덕홍전과 사이에 회랑이 있었다고 합니다
. 회랑이 있었던 자리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
함녕전을 화면에 최대한 잡아보았습니다
. 팔작지붕
, 겹처마
, 초익공
, 정면
9칸 측면
4칸
, 서쪽
4칸은 꺽어
“
ㄴ
”
자형 건물 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
한옥 구조에 대하여 공부를 조금 해 보았습니다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지붕의 형태 세 가지 즉 맞배
, 우진각 그리고 팔작지붕이 있는데, 함녕전은 그 중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입니다
. 그런데 아직 겹처마와 익공에 대하여는 더 공부를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
대들보를 기둥에 올리는 연결 부위를 공포
(拱包
)라 하고 공포에 주심포
(柱心包
)와 다포
(多包
)가 있는데 익공
(翼工
)은 주심포의 변형인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 함녕전은 익공식 중에서 밖으로 내민 혀모양나무가 하나인 초익공
(初翼工
)이라고 합니다
.
고종황제께서는 황제위에서 물러 난 후에도 계속 함녕전에 머무시다가
1919년
1월 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셨습니다
.
함녕전의 뒤 편입니다
. 전에는 주로 건물 앞 만 대충 보고 지나쳤는데 이제는 뒤쪽과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에도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
함녕전 뒤 편에 두 단계로 화단이 구성되어 있고 작은 소나무 숲 너머로 정관헌이 보입니다
. 그러니 정관헌은 함녕전 후원의 정자인 셈이군요
. 정관헌으로 갔습니다
.
정관헌은 고종황제가 손님들과 차를 마시던 장소라고 합니다
. 서양식으로 지으면서 전통 문양을 첨가한 혼합식이라고 합니다
.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
계속 숲 길을 걸으면 석조전의 뒤편으로 가게 됩니다
. 석조전에서 석조전 서관
(별관
)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있습니다
.
오른쪽에 보이는 서쪽 담 장 너머에 미국대사관이 있습니다
. 고종황제는 점점 증대되는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 당시 영국과 미국의 공사관 그리고 약간 멀리 러시아 공사관에 둘러싸인 이 덕수궁을 법궁
(法宮
)으로 정하고 무진 애를 썼지만
, 결국 대한제국을 지켜내지는 못하셨습니다
.
석조전은 현재 내부 수리 중 이었습니다
.
가림막에 옛날 건설 초기사진이 걸려 있어 찍었습니다
. 영국인 하딩에 의하여 신고전주의양식으로 짓고 내부는 로코코식으로 장식하였다고 합니다
.
신고전주의는
19세기에 그리스식을 되살려 지은 양식으로 석조전 기둥의 주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오니아식입니다
.
로코코식은
17세기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궁으로 대표되는 웅장한 바로크양식에 대항하여
18세기 초 집 내부를 곡선을 주로 사용하여 우아하게 꾸민 방식이라고 합니다
.
서관
(별관
)은 미술관으로 쓰이는 역시 신고전주의 양식이고, 앞에 서 있는 기둥의 주두는 이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코린트식 주두 입니다
.
“
피카소와 모던아트
”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 작년 연말에 이 전시를 보았습니다
. 모던아트는 역시 이해 하기 어려웠습니다
.
석조전과 서관을 다 넣어 한 장에 찍어보았습니다
. 그 사이 정원은 역시 서양식정원입니다
.
동양에서는 정원을 꾸밀 때 물이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폭포를 설치하였고
, 서양에서는 역으로 물을 중력에 대항하여 위로 치켜 올리는 분수를 선호하였다고 합니다
.
분수가 있는 정원 남쪽으로 광명문이 서 있습니다
.
덕홍전이야기 할 때 잠깐 언급하였지만, 바로 이 문이 덕홍전 정문이었는데 일제시대 때 이곳으로 이전되어 문짝은 떼어 내 지고 문루만 남아 그 아래에 흥천사종
, 자격루 그리고 임진왜란 때 쓰였던 신기전화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대한문으로 나가는 길에 중화문과 중화전을 한 화면에 담았습니다
. 사진은 앞에 중화전이야기 하는 부분에 넣어져 있습니다
.
대한문을 나와 정동길을 따라 가다가 정동교회를 지난 후 정동극장 바로 다음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막다른 곳에 중명전이 있습니다
.
1900년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에 의해 설계된 건물입니다
.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역사를 가진 건물입니다
.
전에 정동길 걷기 할 때는 이런 건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 앞길을 걸었습니다
.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를 갖고 있는 건물이자만 이런 곳도 보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요
.
다시 돌아 나와 시청앞을 지나 을지로입구역 쪽으로 가다가 프레지던트호텔을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원구단
(환구단
)터가 나옵니다
. 계단을 올라가면 원구단 시설물 중 남아있는 삼층팔각정자인 황궁우가 있습니다
. 신위를 봉안하던 장소 랍니다
. 원구단은
1897년 고종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던 행사장이었는데, 일제시대에 원구단을 해체하고 철도호텔을 지었습니다
. 현재는 조선호텔이 들어 서 있습니다
.
원구단 시설에
1902년에 추가된 석고
(石鼓
)를 황궁우와 한 화면에 넣어 보았습니다
.
원구단 본체와 황궁우 사이에 있던 삼문을 통해 황궁우를 찍어 보았습니다
.
이것으로 덕수궁 걷기를 마쳤습니다
. 덕수궁은 조선말기에서 대한제국을 거치는 시기의 역사를 담고 있는 궁입니다
. 아관파천 후 고종이 이곳을 법궁으로 하면서 궁으로 모습을 갖추었지만 대한제국부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파괴 되었고
, 대한민국으로 된 후에도 경제개발과 민주화에 밀려져 우리의 역사 유물은 제대로 보호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이제는 덕수궁을, 가능한 범위에서, 옛 모습을 찾아 주는 노력이 기울여 지기를 기대하면서 오늘의 덕수궁걷기를 마쳤습니다
.
백학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