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둘을 각각 10년씩 미국에 유학 보내는 동안에 졸업식과 같이 기쁜 날만 있었던 것만은 분명 아니었지요. IMF 시절 천정부지로 뛰는 미국 달러화 때문에 아파트를 팔 아서 보내고도 끝이 안 보이는 유학비용을 송금할 때마다 노심초사 하던 일은 부모 몫 이라 하더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있었고 그 것들이 주마등 마냥 스쳐갑니 다.
큰 아이는 똘똘한 덕분에 모든 경쟁을 무난히 돌파했지만 둘째 아이는 한국 교육 환경 에 잘 적응하지 못하다가 중3때 조기 유학을 떠나 미국식 전인교육 덕분에 자신감을 회복하여 Seattle에 있는 University of Washington을 졸업하고 현재는 고려대학교 국제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 둘 모두 성공한 케이스 라고 평가를 내리고 자위하고 있습니 다.
초등학교 시절에 전 가족과 함께 미국 대륙횡단까지 함께 했던 둘째 아이는 아무 생 각 없이 갔던 유학 첫날 현실을 비로서 인식하고 엄마랑 눈물의 대화를 하는 바람에 엄마도 울고 아빠는 뜬 눈으로 날을 세야만 했었습니다. 요즘과 달라 국제 전화비가 매달 5십만 원을 상회하곤 했지요. 평소에 먹지도 않던 김치가 먹고 싶다, 엄마가 보 고 싶다 등 향수 병에 걸려 교장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시 귀국시켜 마음을 달 래서 보낸 적도 있습니다.
New Hampshire의 Dublin School에 다니던 둘째 애는 방학 후에 돌아갈 때는 New York Trans하여 Boston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School Bus로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는 데 하루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KAL이 연착하는 바람에 Trans를 놓쳐 부득이 John F Kennedy 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기 위해 뉴 와크 공항으로 옮겨야 하는데 고교 1년생에 게는 무리지요. 그 것도 자정이 넘은 무렵에 Taxi를 타라고 하기도 그렇고 방법이 없 어 발만 동동 구르며 밤을 지새야 했는데. 그 때 위기를 잘 넘긴 녀석은 지금도 험난 한 파도는 유능한 선원을 만든다고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큰 애도 고교 졸업 후 처음 유학을 가서는 싫다고 사흘 만에 돌아와버렸습니다. 돌대 가리 미국 애들이나 여자만 밝히는 룸메이트 때문에 면학분위기가 안 된다는 것이지 요. 재차 유학에 도전하여 NYU를 졸업하고 San Diago에 있는 Scripps에 다니던 시절 에는 외롭다고 투덜대는 것입니다. 아빠 친구 아들들을 소개해 준다고 해도 싫답니 다. 게들은 한국인 형상만 하고 있을 뿐 미국 애들이랑 똑 같아 대화가 안 된다 네요. 또한 연구소에서 Post doc을 하고 계신 수십 명의 박사님들은 너무 늙었다나 뭐래 나. 어떻게 하면 좋겠냐 했더니 친구들이랑 농구하고 영화나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그 냥 놀고 싶답니다. 방법은 대륙을 횡단해서 뉴욕으로 날아가서 고교와 대학 친구들 만 나서 회포를 풀고 오랄 수 밖에요.
두 애가 유학을 떠날 때 써준 글이 “飮水思源(음수사원)”이었습니다. 물을 한잔 마시 더라도 그 것이 어디서 왔음을 알고 감가하는 마음으로 마시라고 부언을 해주었는데 아직 기억을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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