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3년전 등교길....
쬐꼬만 까까머리 중학생놈하나 콩나물시루 버스속에 밀리고 터지고 찢기면서 차장누나의 억센 팔에 낚아채이듯 버스문밖으로 튕겨져 겨우 내린 곳이 광화문 시민회관앞. 교복 매무새 다듬고 모자 똑바로 쓰고 배지 정돈하고 힘겹게 가방들고 발걸음 재촉한다. 광화문 네거리 숭문사 모퉁이에서 우향우하여 덕수제과앞 지나 새문안교회, 구세군회관 거쳐 좌회전하여 허름한 중국집 긴 벽돌담장끼고 서대문쪽으로 계속 직진하여 걷노라면 여기저기 눈에띄는 접골원들. 길 건너 왼쪽 축대높은 계단으로 까만 교복의 피어선고등공민학교학생들 줄줄이 오르고 있다. 바로 그 맞은편 우측으로 돌면 드디어 우리학교 교문입구. 양옆으로 늘어선 조그만 매점들에 올망똘망 학생들 재잘거림이 제법 부산스럽다. 털보네 가게에서 준비물도 챙기고 새로나온 신제품인 안전병아리잉크병, 만년펜촉등 신기한 듯 호기심어린 충동구매욕에 잠시 시달려보기도 한다. "너 들어오기만 해봐라" 라는듯 부릅뜬 눈으로 교문에 지켜서있는 규율반 형들과 맞닥뜨리기 전의 긴장된 분위기가 자못 스릴스럽다. 등교길중 가장 숨막히는 하이라이트, 교문통과의식이 무사히 치러지면 안도감에 한결 가쁜해진 마음은 날아갈 듯 걸음을 재촉한다. 탁트인 본관 교정 우측으론 포충탑 그리고 고목나무사이로 음악실이 보이고 좌측으론 삼일탑,농구대 그리고 미술실이 시야에 들어온다. 본관 왼쪽편으로 돌아 위운동장밑 중학교 교사쪽으로 방향잡고 오디열매 탐스런 뽕나무숲을 지나면 서너군데 오르막계단이 제법 난관이다. 턱밑까지 가쁜숨 몰아쉬며 신관 현관문 열고 들어서면 까까머리 꼬마녀석의 길고도 험난한 등교길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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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나는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문화유적탐방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기회를 갖었다. 마침 답사장소가 우리의 학창시절 보금자리였던 경희궁인지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에서 경희궁까지 걸어오는동안 이미 43년전으로 Rewind된 내 머릿속 비디오테잎은 옛 추억속 영상을 생생하게 재생하며 돌고 있었다.
"경희의 옛궁터의 주인이 되어 선열의 남기신뜻 이어감으로---" 그저 별 뜻없이 주절거렸던 교가의 그 한구절이었지만 조선시대의 경희궁, 일제식민 시대의 경성중학, 광복후 서울중.고등학교 그리고 다시 조선시대의 옛모습으로 돌려 진 현재의 경희궁터에서 과연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있음을 실감할수 있었다.
1617년 광해군때 조선 5대 궁궐중 하나로 창건된 경희궁은 처음엔 경덕궁으로 불리었 으며 영조때 경희궁으로 개명하였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가 이곳에 서 즉위하였으며 창덕궁.창경궁을 동궐, 경희궁을 서궐로 부르며 조선왕조의 대표적 궁궐로 자리를 굳혀왔으나 일제때 일본인이 경희궁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궁궐의 정 문인 흥화문(원래는 아래운동장 구세군회관쪽)을 이등박문의 사당이었던 박문사(현 재의 신라호텔)정문으로 이전하였고 궁터에는 일본인 학교인 통감부중학을 설립하였 고 이후 학교명을 경성중학교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제가 태평양전쟁때 지하기지로 사용하기위해 판 것으로 추측되는 방공호에 서 호기심많았던 학창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우습기도 하였지만 식민통치시대의 일제 의 잔학한 침략사의 현장을 보는듯하여 숙연해지는 기분 억누를수 없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식민통치라는 400여년간 수난의 역사를 겪으면서 영광보다 는 상처로 얼룩진 이 역사의 현장에서 짧지만 한때 주인으로 행세하였던 우리에게 과 연 선열의 남기신 뜻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이 시대에 지금 우리는 어떻게 역할하 여야 하며 또한 우리는 이 뜻을 어떻게 후대로 이어가야 할지 실로 막중한 책임감이 짓누누르고 있음을 부인할수 없었다.
과연 그때 43년전......... 까까머리 중학생의 머릿속에 이 치욕의 역사의 편린이라도 남아있을 만큼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서 제대로 교육받았었는지...... 그래서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정신적으로 재무장되었는지.....
작금의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등을 접하면서 그들을 규탄하기에 앞서 우리는 과연 우리 2세들에게 그 선열의 남기신 뜻이 이어지도록 경희의 옛궁터의 주인 행세를 제대로 했는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의 인왕의 억센바위만이 무언의 침묵으로 나의 안타까움을 대변하는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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