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100의 값어치를 그렇게 실감해본 적이 없다. 평소 하던 데로 100불을 레닌그라드 공항에서 루블로 바꾸었는데 다시 US Dollar로 바 꿀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때는 1992년, 당시 쏘련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미명아 래 개혁을 추진 중이었고, 우리에게는 IMF 전이라 그리 부담이 되는 돈은 아니었지만 그 곳에서 그 돈을 다 소비하기란 만만치가 않았다. 대학교 교수 봉급이 30$이던 시절 이니 구매력은 상당히 어마어마하지만 살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시내를 돌아 보면서도 간혹 국영 상점에도 들러 보았는데 진짜 살만한 것이 없다. 주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열심히 안내하는 통역과 대외담당 책임자에게 무상으로 주 자니 비즈니스 원칙 상 맞지 않고 또 받을 지 여부도 확실치 않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 만 러시아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면 체제비는 물론 용돈까지 주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 란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가 묵는 호텔에 들려 우리의 식대를 꼬박꼬박 계산하 는 모습을 보니 한편 측은한 생각이 들던 차였기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주겠다고 했 더니 막무가내다.
Kiosk(거리의 상점)을 지나다 보니 맥주가 눈에 띄고 갑자기 갈증을 느껴 6 Can 짜리 한 박스를 사려고 했더니 극구 말린다. Can 하나에 1불 정도 하는 비싼 것을 왜 사느 냐 였고 한 병씩 먹자고 권했더니 표정이 시큰둥하다. 별 맛을 모르나 보다. 하긴 전 날 호텔 방에서 Scotch Whisky(Malt Whisky, Glenfidich)를 권했더니 맛이 없다고 하며 자기들은 Vodka나 샴판스키(러시아식 샴페인)만 마신다고 하던 생각이나 옳다 하고 그 가게에서 팔고있는 Smirnof Vodka 두 병을 20$ 상당의 루불을 주고 사서 각 일 병 씩 선물을 했더니 이 번에는 반응이 진짜로 놀랍다. 통역은 눈물을 글썽이며 집사람 이 결혼한 이래 Smirnof Vodka를 먹어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는데 내가 꿈을 실현시 켜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Dr. Dankova는 아껴두었다가 크리스마스에 남편과 한잔 하 겠다고 한다. 20불 정도를 쓰고 이렇게 감동을 준다면 어느 누가 망설이겠는가. 물론 러시아의 보드카가 유명하고 그 중에도 스톨리아치나가 대표적이지만 스미르노프는 미국으로 이민간 러시아인이 만든 보드카로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기에 그 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나 보다.
맥주 사서 마시고 보드카를 선물해도 반 이상이나 남았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그렇다 고 흔해빠진 러시아 인형이나 액세서리는 더 이상의 흥미를 끌지 않는다. 벌레가 투명 하게 보이는 보석 호박도 관심 밖이다. 레닌그라드의 제일 큰 국영상점 2층을 둘러보 고 나오려는 순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바로 그림이다. 나하고 인연이 되려 고 그랬는지 러시아 특유의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의 연못에 버려진 나목이 테마인데 심오함과 쓸쓸함 그리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모두 담아 표현하고 있다. 흥정을 하고 나 머지 루불을 거의 소진했다. 난생 처음 유화를 구매한 것이었고 런던을 경유하여 한국 에 돌아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핸드 캐리를 했고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보다 좋은 그림을 수집하다 보니 중요 위치를 상실하고 아들 방에 걸려있지만 일부러 가끔 그 방 에 들러 그 때의 추억으로 돌아가곤 한다. 아직도 조강지처와 같은 애착을 가지고 있 는 것 같다.
100불로 바꾼 루불을 소진하려고 애쓰던 어리석음이 출발이었지만 본인의 그림 감 상, 수집 그리고 소장으로 취미(?)가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에는 러시아에 출장 을 갈 때마다 국영상점과 화랑을 둘러보는 것이 상례화 되었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구 입해와 가까운 친지들과 나눔의 기쁨을 가져 보았다. 단골 치과, 친구, 신세진 분들의 집 벽에 소중하게 걸려있는 그림을 다시 대할 때는 느끼는 감정 또한 뿌듯하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이라면 작은 돈은 장고하고 큰 돈은 빠르게 결정한단다. 큰 돈은 꼭 써야 하고 쓸 시기가 있으므로 빠르게 결정하면 실기하지 않으나 작은 돈은 미루고 아 끼다 보면 큰 돈이 된다고 하던데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20불을 주고 산 두 병의 보드카와 국영상점에서 구입한 그림은 두고두고 구매 금액 이상의 값어치를 한 다는 생각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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