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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진 조선일보기사 -- 유 태식

조회 수 9623 추천 수 0 2010.10.29 10:04:47

한강의 색소폰 연주자 유철진

5년 전 서울 한강 고수부지에서 한 중년 남성이 '알토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등산복에 샌들을 신은 남자의 연주는 '도레미~ 도레미~'의 무한 반복이었다. 한마디로 소음과 다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5~10월 주말이면 페인트칠 벗겨진 구형 프라이드를 몰고 한강을 돌아다니며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요즘도 한강에서 이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3년 전부턴 다리 밑이 아닌 잔디밭으로 진출했으며, 더는 음정 연습이 아닌 공연을 한다는 점이다. 올해부턴 평일 저녁에도 가끔 '출몰'해 팝송, 성인가요, 최신가요를 번갈아가며 연주하고 있다. 도와주는 사람도 생겼다. 근처 편의점 주인은 스피커에 연결할 전기를 끌어다 쓰게 해주고, 어묵·컵라면이나 음료수를 건네주기도 한다.

요즘 유철진의 공연은 목요일 구로디지털밸리, 토요일은 영등포공원, 일요일은 이촌한강시민공원에서 진행된다. 그가 맹렬한 연습을 벌였던 당산철교 밑에서 포즈를 취했다. /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이 남자 유철진(61)은 지난해 말 정년퇴임한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자다. 그는 1968년 서울고등학교를 차석 졸업하고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비료·정유회사 개발부장을 거쳐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국장으로 일했다.

학창 시절 유철진은 공부만 할 줄 아는 모범생이었다. 더듬는 말투에 타고난 음치·몸치였다. 중학교 때까지 사람들이 "노래 불러보라"고 하면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하는 동요만 불렀다. 체육시간에는 당번을 자처해 교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서울고 20회 동창회 총무 이동수(61)는 "철진이는 머리가 비상해서 수석 졸업한 친구보다 공부를 잘했는데, 예체능 점수가 형편없어 2등 졸업을 하게 된 친구"라고 했다. 유철진은 교수가 꿈이었지만, 졸업 무렵 가정형편 때문에 당시 월급을 많이 주던 비료회사에 취직했다.

모범생의 운명은 결혼 후 빗나갔다. 1988년 봄 그는 상사를 따라 남대문 근처 J 카바레에 들어섰다. "직속 상사가 춤꾼이었다. 회식 때마다 가서 춤을 추는데, 나도 춰보고 싶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춤바람 든 거다."

공부하듯 이번엔 '춤바람'에 열심이었다. 유철진은 점심 때마다 종로의 교습소에서 매일 1시간, 일주일에 6일씩 사교댄스를 배웠다. 2003년까지 그는 직장생활 외엔 지르박·블루스 추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족들이 힘들어했다. 아내와 다툼이 많아졌고, 아이들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해 말 5호선 송정역을 지나가던 유철진은 '매혹의 소리 색소폰을 배웁시다'라는 광고를 발견했다. 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지 부인은 "능력이 되면 해보라"고 했다. 유철진은 비로소 춤에서 벗어났다.

연말 성과급을 보태 악기를 사고, 화곡동의 음악학원에서 1년2개월간 배웠다. 그는 "굽이치는 멋진 모양, 거칠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나는 색소폰을 불면 음악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뿌듯했다"고 말했다. 유철진은 2004년 8월 화곡역에서 학원이 홍보 목적으로 마련한 수강생 무대에서 연주회도 가졌다.

아버지의 지하철 무대를 지켜본 두 아들은 "'삑사리'는 괜찮아도 박자가 안 맞아 도대체 무슨 노랜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모일 때마다 색소폰을 들고 나오는 그에게 "두 곡 이상 못 들어주겠다"고 털어놓았다.

유철진은 2005년 3월 학원을 그만두고 한강 다리 밑에서 맹렬한 독주를 시작했다. 처음엔 번번히 소음 신고가 들어왔다. 행인이 "실력도 안 되는 데 폼 잡는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2년쯤 지나자 악보 없이 100곡쯤 연주하고, 기교는 없어도 박자와 음정이 제대로 맞는 연주를 할 수 있게 됐다.

"평생 연구직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골프도 안 쳤다. 나는 늙어서도 못하는 게 더 많았다. 일 그만두니 이제는 색소폰 부는 게 전부가 됐다. 그런데 참 행복하다."

유철진은 2007년부터 명절·휴가철에 혼자 배낭여행을 떠나고 있다. 체코 프라하 카를대교에서 '불법 거리 공연'으로 경찰에게 벌금을 물기도 했고, 백두산에서는 그리운 금강산을 연주했으며, 남미 여행에서 아르헨티나의 탱고와 브라질 삼바에 맞서는 한국 성인가요를 들려주기도 했다.

색소폰으로 만난 사람들은 유철진을 응원했다. 서울 영등포 역의 한 노숙자는 소주 한병과 꼬깃꼬깃하게 접은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와 "(당신 반주에 맞춰 내가) 한 곡조 부를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전남 여수의 한 할머니는 "어차피 돈 쓸 곳도 없는 데 좋은 노래 들었으니 맥주 사먹으라"며 용돈을 쥐여줬다.

아직도 가족들은 이 남자의 색소폰 사랑을 전적으로 응원하진 않는다. 섭섭한 게 당연하다. 유철진은 "제멋대로 내 인생 살겠다고 돌아다니는 것 같아 가족에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자기 꿈'이 먼저다. 일단 이달 말, 아프리카에 가서 원시부족들에게 한국 성인가요를 들려주고 올 계획이다. 가족에게는 그 다음부터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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