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 계시는 벗 님들
:
5 월
16일
, 충주로 걷기를 갔습니다
. 탄금대를 다시 가 보기 위하여 갔습니다
. 한
20 여 년 전 충주를 지나가는 김에 한 번 들러 탄금대를 가 본 적이 있지만 이번에 다시 찾았습니다
.
충주공용버스터미널에 내려 보니 터미널 건물이 새로 지어진 건물이었습니다
. 건물 내 관광안내소에서 충주관광지도를 하나 얻어 오늘 걸어 볼 코스를 생각하여 보고 터미널을 나와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 터미널 앞의 택시 기사는 걷기에는 너무 머니 택시를 타라고 하였지만 운동 겸 걷기로 하였습니다
.
한
30분쯤 걸어 탄금대 공원에 도착하니 입구에 탄금대유래가 적힌 안내석이 서 있었습니다
.
탄금대라는 지명은 이곳 대문산에
1400여 년 전 가야의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함으로써 유래하였고
, 1592년 임진왜란 때 순변사 신립장군의 패전 장소라고 간단히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
안내석 뒤편 대문산 언덕에 올라 아래 벌판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 벌판은 제천에서 내려오는 남한강과 괴산 쪽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을 좌우로 두는 평야이었습니다
. 1592년
, 신립장군은 이 대문산과 그 뒤로 흐르는 남한강을 등진 배수진을 치고 앞에서 진격해 오는 고니시의 군대와 마주 하였겠지요
.
여러 자료를 들쳐 보면 이 때 신립장군이 이끌고 온 조선군은 약
8000명 이었고 주력은 기병이었다고 합니다
. 신립장군은 그 전에 함경도에 쳐 들어 온 여진족과 싸우기 위해 기병을 양성하고
, 그 기병을 이끌고 여진족을 물리쳤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보병으로 구성된 고니시의
1만
5천 정도의 왜군을 기병으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으리라고 추측을 해 봅니다
. 어딘가 역사자료집에서 기병
1기는 대략 보병
8인의 전투력과 맞먹는다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
한
5년 여 전에 낙원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
감독의 영화 십 여 편을 특집으로 보여주는 주간이 있어 그 중 몇 편을 골라 본 중에 그 유명한
“가게무샤
”
도 있었습니다
. 영화
“가게무샤
”는 일본 전국시대
“다께다 신겐
”
이라는
“나가노
”의 다이묘가 죽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 위하여 대리인을 즉 가게무샤
(影武者
)를 두었다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었습니다
.
가게무샤는 처음에는 역할을 잘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부상을 당한 후 치료 중에 가짜라는 게 탄로가 납니다
.
“다게다 신겐
”
의 아들
“가스요리
”는 곧 이 가게무샤를 내 쫒고 자신이 후계를 이음을 공표합니다
.
“다케다 신겐
”
을 두려워하여 그 동안 가만히 있던
“오다 노부나가
”
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
는
“다케다 신겐
”
의 죽음을 확인하자 곧 연합군을 형성 나가노를 침공합니다
.
“가스요리
”는
2만
5천의 대군을 일으켜 방어전에 나서
, 1573년 나카시노에서 일대 회전을 벌입니다
.
“다케다 신겐
”
이 길러 둔
1만 기병대는 나카시노 평원에서 돌격을 감행합니다
.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
”
는 이미 포르투갈 사람에게서 전해 받은 조총으로 무장한
2만 철포병을
3열로 세우고 달려오는 기병대에 연속적으로 조총을 발사합니다
. 이 전투 장면은 달려오는 기병대와 조총을 쏘는 철포병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 만으로 격렬한 전투 장면을 실감나게 보여 줍니다
. 헐리우드영화에서 많은 전투 장면을 보았지만 이렇게 실감나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고 생각 듭니다
. 전투 장면 끝 부분은 음향을 다 중단한 채 쓰러진
“신겐
”
의 기병대 주검을 무성
(
無聲
)으로 훑어 나아갑니다
. 제가 본 영화 전투장면 중 가장 처절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 영화를 보면서 바로 이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이끈 조선기병대의 모습이
“신겐
”
의 기병대와 오버랩 되어 머리에 떠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 나카시노 전투가 있은 지
19년 후인
1592년
, 이 탄금대 벌판에서 나카시노전투의 재판
(再版
)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
신립장군은 이 전투에서 패함으로 역사에 죄인이 되어 버렸고
, 후세 사람들에게서 왜 무리한 배수진전법을 채용하여
8000천 관군을 전멸시켰냐고 추궁을 받습니다
. 그러나 백학은
“
가게무샤
”
영화를 봄으로 아무리 용감한 기병이라도 조총으로 무장하고
3열 사격 훈련을 잘 받은 보병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 활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총이라는 무기의 성능을 모른 채 돌격을 감행하였으니 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16세기 그 당시 세계화에 뒤졌던 조선 육군의 패배는 어쩔 수 없었지요
.
공원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 탄금대 노래비가 있었습니다
. 주현미가 불렀었군요
.
조금 더 가니 충혼탑이 있었습니다
. 1955년에 광복 이후 전몰한 충주 지역의 장병
, 경찰관
, 군속 그리고 군노무자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고 합니다
.
탑에 쓰인 충혼탑
(忠魂塔
) 이라는 글씨는 초대 대통령이셨던 이승만 박사의 국내 유일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
지난 봄에 서울 이화장을 찾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 이제 대한민국의 초석을 세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 과오는 있었지만 인민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공적은 과오를 훨씬 뛰어 넘는다고 생각됩니다
.
계속 더 가니 팔천고혼위령탑이 서 있었습니다
. 탄금대 전투에서 스러져 간 팔천고혼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
탑의 정신은 좋습니다
. 하지만 탑에 부설된 조각상에는 약간의 불만이 있었습니다
. 탄금대 전투의 조선 주력은 기병이었습니다
. 신립장군상
(像
)은 기마像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군요
. 그리고 아래 조선관군像
4 기는 관군이 아니라 민간복을 입은 어떻게 보면 의병처럼 보였는데 패하긴 하였어도 분명히 관군이었으니 조선군복을 착용하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 하였습니다
. 기마像이었으면 더 더욱 좋았겠지요
.
열두대라고 이름 지어진 신립장군순국之地 에 갔습니다
. 남한강 강물이 휘돌아 가는 지점에 절벽을 이룬 지점으로 아마 신립장군이 마지막에 강으로 말을 몰아 순국한 지점으로 생각되는 곳인 것 같습니다
. 400여 년이 지나
, 아래로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흔히 쓰이는 말로
“
강물은 말 없이 흘러만 간다
”
라는 표현이 생각납니다
.
그런데
, 열두대라는 지명의 유래가 신립장군이 활 줄을 식히느라 열 두 번을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
공원을 돌아 신립장군을 기리기 위한 충장공순절비를 보고
,
우륵추모비를 보았습니다
. 몇 년 전에 김훈님이
“
칼의 노래
”
다음 편으로 우륵의 이야기로 쓴
“
현의 노래
”
도 읽었습니다
. 많지 않은 삼국시대의 역사자료를 바탕으로 심훈님의 저력이 베어 있는 작품이었지요
.
우리 민족이
1400여 년 전에도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가야금이라는 민족의 악기를 발명하였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예술감각이 뛰어났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시내로 돌아와 건국대학교병원 앞에서 기념 사진 하나 찍고 터미널로 돌아 와 오늘의 충주 탄금대 걷기를 마쳤습니다
.
백학 드림
상기 내용은 이제 백학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floatingmoon
에 수록되어 있습니다